'한겨레'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8.08.24 학살된 '비정상적 죽음'을 기억할 이유_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2. 2018.08.03 8월에 읽으면 좋을 학술·지성 새책 『근현대 중국 이상사회론』
  3. 2017.06.19 [크리틱] 소설의 재발견, 사할린의 재인식 / 이명원 (한겨레) (1)
  4. 2017.04.06 블랙리스트 집행기관 전락 진흥원 출판계에 돌려줘야
  5. 2016.10.24 이택광의 시 | 버스는 두 시반에 떠났다 | 오래, 그냥(한겨레) (1)
  6. 2016.09.02 EP.2 간절곶엔 포켓몬만 있는 게 아니에요! (1)
  7. 2016.08.04 EP.1 왜성이 뭐예요? 뭐 뭐예요? (2)
  8. 2016.07.18 왜성을 통해 역사 속 그날을 깨워본다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책소개) (2)
  9. 2016.05.27 5화-왜군, 진해에 수군기지를 건설하다-진해 웅천, 안골, 명동, 자마 왜성 (2)
  10. 2016.05.20 4화-왜장 가토, 우물 없는 ‘철옹성’에 갇히다-울산왜성 (1)
  11. 2016.05.13 3화-왜구 막아냈던 ‘신라 의성’ 에 왜성이 들어서다 - 부산 구포·양산·호포 왜성
  12. 2016.04.15 0화 -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4)
  13. 2015.11.25 '2015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 다녀오다. (3)
  14. 2015.10.30 "신경숙 작가 표절 논란과 문학권력" - 한겨레신문 최재봉 문학기자 강연 (2)
  15. 2015.04.17 구한말 지식인의 협량한 정신세계를 보다 (한겨레)
  16. 2014.06.11 [한겨레] 과거청산, 가장 강력한 '현실정치'
  17. 2014.01.23 [한겨레 칼럼] 국가주의와 문학
  18. 2008.11.28 지역에서 출판하기 (2)

 

 

한겨레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빨갱이'가 된 인간의 뼈, 그리고 유해발굴

노용석 지음/산지니·2만5000원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다. 종교나 이념 대립, 민족 갈등, 권력쟁탈전 등의 무력충돌에선 종종 ‘국가’의 이름으로 대규모 학살이 동반된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한국전쟁, 4·19혁명, 5·18광주항쟁 등 비극적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100만명이 넘는다.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진실을 드러내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어두운 과거사 청산과 공동체 회복의 필수 조건이다.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는 국가폭력 연구자인 노용석 부경대 교수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실태와 반세기 만에 이뤄진 유해발굴 사업의 과정과 결과를 되짚고 그 상징적 의미를 고찰한 책이다. 지은이는 2006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이끌었다.


 지은이는 먼저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이 전쟁 와중에 우연히 발생한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획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집단학살이 전쟁 발발 석 달 새 국민보도연맹을 중점 대상으로 신속하게 이뤄졌다는 점이 근거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희생 중 진실규명이 된 것만도 8187건, 희생자 수는 1만2364명에 이르지만, 이조차도 전체 피해자 규모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 중 한국 군경과 예비검속 및 보도연맹, 미군 관련 사건이 78.4%, 적대세력 관련 사건이 21.6%다. 피학살자 5명 중 4명은 한국군과 미군의 손에 죽은 셈이다.

 

 

 2015년 2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해를 피해자유족회 등 민간공동위원회가 발굴하는 모습. 대전/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지은이는 유해 발굴은 단순히 법의학 지식과 기술로 땅속에 묻힌 유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이상으로, 한 사회의 기억과 기념 정치의 상징적 표상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사회의 학살 개념이 ‘양민’, 즉 좌익 혐의가 없는 깨끗하고 착한 백성에 한정됐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00년대 들어서야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피학살자의 범주를 ‘비무장 민간인’으로 재규정하고 나서야 ‘빨갱이 기피증’ 같은 이념적 이분법을 벗어났다.


 지은이는 죽음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필립 아리에스와 뒤르켐 등의 선행연구를 인용해, 피학살자의 죽음을 ‘비정상적 죽음’으로 분류한다. “생물학적으로는 사망과 같지만 사회적 규범을 어기거나 의례과정이 생략돼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죽음”이란 얘기다. 유해 발굴이 진실의 복원을 넘어 ‘기념’과 ‘위령’이라는 의례로서 의미를 갖는 이유다.


 이같은 ‘기억의 정치’는 주체와 방식이 중요하다. 지속적 발굴과 위령사업은 국가의 참여가 필수적이되, 형식적이고 획일화된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 지은이는 “거대한 위령탑과 추모공원을 동반한 ‘양민성’의 부각이 아니라 국가주의를 넘어 ‘비공식적 역사’ 속에 잠재돼 있던 수많은 기억들을 자유롭게 추념하는 사회적 기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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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노용석 지음 | 320쪽 | 25,000원 | 2018년 7월 31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연구와 유해발굴 사업을 주도해온 노용석 교수가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를 출간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전쟁 전후기 국가폭력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전개과정을 밝히고, 더불어 피학살자들의 유해발굴 과정과 그 상징적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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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학술/지성 새 책

 

근현대 중국 이상사회론-오래된 미래, 중국식 사회주의의 기원을 찾아서

 

중국 근현대철학을 연구해온 이연도 중앙대 교수가 ‘이상사회론’을 테마로 근현대 중국 정치사상의 흐름을 짚었다. 장쩌민의 ‘소강사회’, 후진타오의 ‘화해사회주의’, 시진핑의 ‘중국몽’ 등을 관통하는, 대동(大同)이라는 전통 이상론을 지적한다. /산지니·2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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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중국 이상사회론

이연도 지음 | 319쪽 | 23,000원 | 2018. 6. 30

 

중국 정치사상의 흐름을 알기 쉽게 소개한 입문서로 중국 사회 및 학계의 움직임을 조망할 수 있는 사상적 시각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저자는 캉여우웨이의 대동사상을 시작으로 근현대 시기 중국에서 대두된 이상사회론의 정치철학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규명해왔으며, 특히 중국 특유의 전통적 이상사회관의 흐름을 중심으로 ‘중국식 사회주의’에 내재한 사상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데 힘썼다.

 

 

 

 

근현대 중국 이상사회론 - 10점
이연도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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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소설의 재발견, 사할린의 재인식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5월 초에 3권짜리 두툼한 장편소설을 읽었다. 제목은 <사할린>이라 적혀 있었는데, 일면식도 없는 원로 작가의 소설이었다. 소파에서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그만 한밤을 꼬박 새우고야 말았다.


  이 소설은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던 일제 말기 경남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위안부와 노무자로 사할린에 강제연행된 후 그곳에서 겪는 여러 형태의 식민지적 참상을 조명하고 있다. 해방을 전후로 사할린과 경남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참극들, 이를테면 소련군의 점령 이후 일본인들은 고국으로 귀향하지만, 조선인들은 무국적자로 처리되어 사할린에 남게 되면서 초래된 일련의 역사적 고통들, 해방은 되었지만 일제하 민족운동에 대한 박해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뒤틀리고 비화되어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했던 역사적 상황 등이 날카롭게 교직되고 있다.

 

(중략)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가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작가인 이규정은 이 소설을 ‘현장취재 장편소설’로 규정하고 있다. 작가가 사할린에 대해 관심을 둔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라고 하는데, 당시는 미-소 냉전 상황이자 한국과 소련 역시 미수교 상태였으므로, 일본 등의 자료를 통해서만 우회적으로 사할린 문제를 탐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에 비로소 사할린을 직접 방문 취재해 이 소설의 서사적 골격과 디테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데, 소설의 시공간과 중심사건을 끈질기게 탐구하고 장악하려는 열정의 지속은 존중할 만하다.


  소설도 재발견하고 역사도 재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오랜만에 경험한 뜻깊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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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문협·출판인회의 주관 더불어민주당 주최


‘차기 정부 출판산업 진흥 위한 국회 토론회’ 열려

 

도서관 예산 증액해 책과 독자의 거리 좁혀야


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해체·확대개편해 출판 자유 침해 막기를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라는 주제로 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출판산업 진흥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박근혜 정권 때 ‘출판·문화계 블랙리스트’로 훼손된 출판문화 정책의 공공성 회복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달 29일 주요 문학·출판·도서관 단체 20곳이 내놓은 ‘대선 공약 제안’의 문제의식을 심화하고, 각 대선 후보들에게 공약 수용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가 주관하고 도종환·김민기·유은혜·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최한 ‘차기 정부 출판산업 진흥을 위한 국회 토론회-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토론회가 5일 국회에서 열렸다. 블랙리스트 사태와 송인서적 부도로 위기의식이 팽배한 출판계에 새 정부가 생존의 발판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기대를 품은 200여명의 출판 관계자들이 모여 토론회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토론에서는 출판계의 절박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출판 관련 통계수치들이 극적으로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제자로 나선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한국출판학회 출판정책연구회장)가 제시한 통계를 보면, 1년에 1권 이상 책을 읽는 성인의 비율은 1994년 86.8%에서 2015년 65.3%로 21.5%포인트가 빠졌다. 가구당 월평균 도서구입비도 2003년 3만7793원에서 2016년 1만5234원으로 반 토막이 났다. 이 바람에 출판사들도 발행 부수를 줄여 도서 1종당 평균 발행 부수는 2010년 2745부에서 2016년 1457부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문화 재정은 2008년 3.3조에서 2017년 6.9조로 109%나 껑충 뛰었지만 출판진흥 예산은 고작 9.8% 인상에 머물렀다.

 

(중략)

 

특히 이날 출판인들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해체와 확대개편도 강력히 요구했다. 앞서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로 특정 저자와 출판사를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세종도서)에 선정되지 못하도록 진흥원에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올해 초 박영수 특검의 조사 결과 드러난 바 있다. 토론자로 나온 박세중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은 “출판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인인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자 시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책의 힘을 강하게 믿고 있다”며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삼겠다던 박근혜 정권기에 문화의 격은 땅에 떨어졌지만 이제라도 ‘창작, 출판, 독서, 도서관의 자유보장’ 정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2017-04-06 | 한겨레 |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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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대통령 성명서.hwp

차기정부 출판산업 진흥을 위한 국회 토론회 자료집.pdf

 

차기정부 출판산업 진흥을 위한 국회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한 성명서입니다.

 

문학·출판·서점도서관·독서교육 관련 단체의 제19대 대통령 후보 공약 제안

<책 읽는 대통령, 책이 문화정책의 기본인 나라>를 위한 성명서

 

지금 세계는 인간 중심, 문화 중심의 사회로 바뀌고 있다. 이런 사회가 되려면 창의력과 상상력이 넘쳐나야 한다. 문학, 출판, 독서, 도서관 문화 등 지식문화계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꿈과 노력들이 집약되어 책으로 결실된다고 믿는다. 책이야말로 국민 창의력과 상상력의 근본 원천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는 창조적 문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책을 외면하는 사회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없다. 책을 멀리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이며, 위기의 사회이다. 책이 죽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문학 창작의 활성화, 출판문화 진흥, 도서관 인프라의 확충과 서비스 질의 개선, 독서 생활화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책을 읽는 시민의 문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일은 국가와 사회의 엄중한 책임이다.

 

이에 우리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주요 정당 및 후보자들에게 차기 정부의 문화정책으로 다음 10가지를 요구한다.

 

1. 창작, 출판, 독서, 도서관의 자유 보장

대통령 후보는 언론 출판의 자유(헌법 211)와 검열 금지(헌법 212), 학문과 예술의 자유(헌법 221)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언론출판, 학문과 예술이야말로 사상·표현의 자유의 핵심이며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2. 검열 금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과 문화예술기관의 독립성 보장

문화농단의 진상을 분명하게 규명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검열을 근본적으로 막을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각종 문화예술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3. 국민의 생애주기별 독서활동 프로그램 확대

영유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이 생애주기별로 책을 자유롭게 접하고 독서가 생활화할 수 있도록 영유아 북스타트(Book Start), 읽기-쓰기 중심의 학교교육 강화, 독서동아리 활동, 학교와 직장의 책 읽는 시간, 찾아가는 문예·인문학 강좌, 평생학습 플랫폼 구축, 큰 활자 도서의 출판 및 보급 지원, 책 읽는 도시 지원 정책 등을 적극 시행해야 한다. 나아가 독서 증진 활동이 전국의 도서관과 서점 등에서 꾸준하게 펼쳐질 수 있도록 독서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4. 문화부 <독서출판정책국> 신설 및 <독서출판진흥위원회> 설치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는 창작(문화예술정책실-예술정책관-예술정책과), 출판(문화콘텐츠산업실-미디어정책관-출판인쇄산업과), 독서와 도서관(문화예술정책실-문화기반정책관-인문정신문화과/도서관정책기획단) 등 책과 관련된 부서가 흩어져 있다. 책 문화 생태계가 위기인 지금, 책과 관련된 정책 부서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정책 시행의 상승효과를 도모하도록 가칭 <독서출판정책국>을 신설해야 한다. 프랑스 문화부의 도서·독서국이 좋은 선례다.

또한 그 실행기구로 출판 진흥에 국한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을 출판, 독서, 도서관 진흥 업무를 통합하여 집행할 수 있도록 가칭 <독서출판진흥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고 민간 주도의 독립적인 거버넌스를 만들어 책 생태계를 살리는 선봉에 서도록 해야 한다.

 

5. 도서구입비에 대한 세제 혜택 마련

우리나라 한 가정의 도서구입비는 학습참고서를 제외하면 월평균 6천 원 미만에 지나지 않는다. 3인 가구라면 한 사람당 2천원 꼴이다. 과세표준 8800만원 이하 근로소득자에게 연간 도서구입 총액의 15%까지 100만원 한도에서 세액공제 혜택을 주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가계와 기업의 도서 구입과 독서활동을 권장해야 한다.

 

6. 문학창작기금 및 출판진흥기금 조성

문학진흥법을 개정, 보완하여 문학 진흥의 실질적인 상설기구인 한국문학진흥위원회를 설치해야 하며, 창작자 육성과 한국문학 활성화를 위한 문학진흥기금을 조성해야 한다. 또한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출판진흥기금 조성 조항을 신설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출판문화산업 진흥을 위한 실질적 기반을 조성하여야 한다. 각각 5천억원 이상이 모아져야 한다.

 

7. 공공도서관을 3천개로 확충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이 1천개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OECD 주요 선진국에 비해 봉사 대상 인구는 2, 특히 독일의 5배나 될 정도로 여전히 도서관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10년간 2천개의 공공도서관을 증설하여 모두 3천개 수준의 대형 공공도서관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도서관 접근성이 높아져야 국민이 어디서나 쉽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고 지식정보 격차 해소가 가능하다. 또한, 지역 내 여러 도서관의 역할과 협력을 증진시켜 도서관 서비스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고, 전국의 작은도서관이 내실화활성화될 수 있도록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8. 공공도서관 도서구입비와 전문인력 확충

공공도서관의 국민 1인당 장서량은 1.75권 정도로 3권 내외인 미국이나 일본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도서관 전문인력 역시 국제 수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 문화기반시설(도서관, 박물관, 문예회관, 미술관 등) 중에서도 도서관 직원 수가 가장 적다. 전국의 1만 개가 넘는 학교도서관 중 사서교사가 배치된 학교는 1천개가 되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의 도서구입비도 선진국 대비 1/3 수준에 불과하다.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만들어야 한다. 도서구입비를 연간 3천억원 수준으로 확보하고, 도서관마다 전문인력을 충원하여 도서관 서비스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

 

9. 도서정가제 강화와 서점 활성화

도서정가제는 책값의 거품을 없애 독자가 책값을 신뢰하도록 하는 사회적 합의이다. 서점이 가격 경쟁으로 문을 닫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자, 저작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책 문화 생태계 보호의 시발점이다. 도서정가제의 이점은 뚜렷하다. 도서정가제 강화(2014.11.21) 이후 지난 2년간 신간도서 평균 정가가 5.2% 하락하고(19,10118,108), 구간도서 1만여 종의 재정가는 평균 41.4% 인하되어(30,09917,646) 독자의 경제적 편익도 증대되었다. 가격이 아닌 콘텐츠 중심의 도서 구매 패턴 변화, 큐레이션 전문서점의 창업 증가 등 서점계의 의미 있는 변화가 촉발되었다. 그러나 현행 정가제는 법정 할인율(15%)과 각종 편법들을 인정하여 문제가 많다. 도서정가제를 강화하여 제도적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나아가 매력적인 지역서점이 많아져야 독자가 새 책과 접할 기회가 커지고 출판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므로, 정부는 종합적인 서점 육성책을 즉각 마련해야 한다.

 

10. 공공대출권과 판면권 도입

영국을 비롯한 문화 선진국들에서 시행하는 공공대출권은 도서관 대출 도서에 대해 국가가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제도로 1946년 덴마크에서 처음 도입된 이래 유럽 28개국에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도서관 활성화를 기하면서 동시에 저자들도 지적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공공대출권을 도입해야 한다. 또한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출판인의 노력을 보호하는 것이 판면권이다. 출판사가 무단 복제에 대항하고 수업목적 보상금 등을 보상받을 수 있도록 판면권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책 읽는 대통령, 책이 문화정책의 기본인 나라>를 대통령 후보들에게 제안하며, 이를 공약으로 제시할 것을 책 읽는 국민의 뜻을 모아 강력하게 요구한다.

 

2017329

  

Posted by 비회원

조금 쌀쌀하지만, 햇살 좋은 주말이 지나가는 동안 한겨레 신문에 산지니가 출간한 책 『금정산을 보냈다』 의 시가 한 편 실렸습니다. 이택광의 시라는 추천 코너인데요.  무언가를 오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냥'하는 것이 좋다라고 표현하시며,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라는 시를 소개해주셨습니다.

흔히 무엇이든지 의미 두기를 좋아하는데, '그냥'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는 듯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무언가를 관통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원문의 일부는 아래에 있습니다.

 

이택광의 시 |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

오래, 그냥

 

버스는 두 시 반에 떠났다
-도요에서 / 최영철

하루 예닐곱 번 들어오는 버스에서 아저씨 혼자 내린다
어디 갔다 오는교 물으니 그냥 시내까지 갔다 왔단다
그냥 하는 게 좋다 고갯마루까지 가 보는 거
누가 오나 안 오나 살피는 거 말고 먹은 거 소화시키는 거 말고
강물이 좀 불었나 건너마을 소들은 잘 있나 궁금한 거 말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주머니 손 찔러넣고 건들건들
한나절 더 걸리든 말든 그냥 나갔다 오는 거
아저씨는 그냥 나갔다 온 게 기분 좋은지
휘파람 불며 그냥 집으로 가고
오랜만에 손님을 종점까지 태우고 온 버스는
쪼그리고 앉아 맛있게 담배 피고 있다
그냥 한번 들어와 봤다는 듯
바퀴들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 빈차로 출발했다
어디서 왔는지 아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새끼를
일곱이나 낳은 발발이 암캐와
고향 같은 건 곧 까먹고 말 아이 둘을 대처로 떠나보낸 나는
멀어져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먼지를 덮어쓴 채 한참

 

“때로 우둔이 길 없는 길을 오래가게 한다”고 시인은 시집 서문을 갈음했다. 식상한 듯하지만, 요즘 시절을 꿰뚫는 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우둔’이라기보다 ‘오래’일 것이다. 무엇이든 지속하기 어려워진 시대에 시인은 오래갈 것을 주문한다. 역설적으로 그 오래가는 것이야말로 ‘우둔’인 것이다. 오래가는 이라면 개의치 않을 문제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무엇인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는 고집은 ‘우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은 슬쩍 그 ‘비결’을 흘려준다. “그냥 하는 게 좋다”고 말이다. 목적 없이 그냥 하는 것, 다시 말해서 목적 없음이라는 목적. 이 오래된 격언이 시인의 생활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홀로 버스를 타고 그냥 시내에 갔다 오는 한가한 마음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목적에 시달리고, 무엇인가 달성해야 한다는 닦달에 들들 볶인다. (중략)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은 그럼에도 “그냥 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멀어져 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먹먹하게 쳐다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초탈하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곤혹을 감당하는 위인에 가깝다. 미련이 남은 삶이기에 시인은 남아 있는 나날을 지탱해야 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목적에 매여 아등바등 살아왔던 시인에게 ‘도요’에 사는 ‘아저씨’처럼 그냥 시내에 나갔다 오는 삶은 여전히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이하생략)

 

2016-10-22 | 경희대 교수 이택광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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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을 보냈다 (반양장) - 10점
최영철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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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왜성 재발견>후일담


EP.2 간절곶엔 포켓몬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요즘 포켓몬 모바일 게임 때문에 더 유명해진 울산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하해수욕장이 있다. 부산 해운대나 광안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해수욕장이지만 회야강 하구와 연결된 주변 경관이 참 ‘이쁜’ 곳이다. 이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마을 서쪽 야산으로 조금만 오르면 서생포 왜성을 만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에 쳐들어왔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성이다.

 

▲ 서생포 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의 표지 사진이기도 하지요.

 

 

  1990년대 초에 기사 취재 때문에 처음 이 서생포 왜성을 찾아보고 받았던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성벽의 보존 상태나 규모도 그랬지만 세 곳으로 구획된 각 성곽의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ㄱ 또는 ㄴ 자 형태로 꺾이도록 쌓은 출입구 구조와 사선 또는 포물선 형태를 한 성벽 모서리의 선형을 보고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 왜성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을 찾아가면 서생포 수군만호진성 터가 나온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 수군이 주둔했던 성인데 왜란 때 파괴돼 지금은 일부 구간에 성벽 밑부분인 기단석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왜란 때 이 성을 점령한 가토의 왜군이 이 성의 성벽을 헐어낸 뒤 그 돌을 옮겨다 서생포 왜성을 쌓았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의 이 전통 수군 진성은 복구되지 않았다. 대신 조선 수군은 왜군이 이 성을 허물고 쌓았던 서생포 왜성을 진성으로 사용했다.  진하해수욕장 이름도 ‘진성 아래에 있다’(鎭下)는 뜻에서 불려진 것이다.


 

  서생포 왜성과 관련한 이러한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면서 더욱 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울산에 이 곳 말고 가토의 부장이 쌓은 왜성(울산왜성)이 하나 더 있고 부산과 경남 일대에도 왜성이 여러 곳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울산 왜성

 

  ‘왜성 재발견’ 취재는 바로 이렇게 부산 울산 경남지역에 남아 있는 왜성들을 찾아 이들과 관련한 임진왜란사를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부산 울산 경남에서 취재활동을 하고 있는 한겨레 후배기자들과 뜻이 맞은 데다 마침 부산박물관에 왜성 전문가(나동욱 박사)까지 선뜻 나서줘 취재는 전반적으로 큰 무리 없이 순조롭게 이뤄졌다.

 

  하지만 30여개에 이르는 전체 왜성을 10차례로 나눠 함께 답사하다 보니 하루에 3~4개 성을 훑어가는 식으로 취재할 밖에 없었던 한계도 있었다. 필자가 직접 집필을 맡았던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 기장 죽성리와 임랑포 왜성은 모두 하루만에 답사를 끝낸 곳이다. 결국 기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선 전문가와 기자들이 함께 한 기본답사 외에 필자 개인의 별도답사와 보충취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막상 신문에 기사가 나온 뒤에도 그랬지만 이를 보완해 책으로 낸 뒤에도 여전히 내용이 미진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다.


  특히 각 왜성의 특성과 이에 얽힌 임진왜란 역사 및 사연을 알리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 왜성을 어떻게 찾아가서 무엇을 봐야 할지에 대한 정보 제공에 너무 소홀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부산과 근교에 있는 왜성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충분히 주변의 관광지나 유적지 명승 등과 함께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

 

  기장 죽성리 왜성은 시내버스를 이용해 기장 청강리 사거리에 내린 뒤 기장문화원과 남산봉수대를 거쳐 가벼운 산행을 하며 찾아갈 수 있다. 기장문화원과 죽성리 왜성 근처 소름요 도자기 공방에선 임진왜란이 왜 일본에서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유물과 흔적을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 기장 죽성리 왜성

 

  양산 증산리 왜성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증산역에 내린 뒤 걸어서 1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증산공원에 있다. 증산공원 산책길을 한바퀴 돌며 왜성 터도 살펴보고 정수장 쪽으로 하산하면 물금역으로 갈 수 있다. 물금역에선 기차가 아니더라도 부산 덕천동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가 있고 근처 용화사와 임경대와 같은 관광지도 둘러 볼 수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왜성과 주변 볼거리를 찾아 보고 즐길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

 

글 | 신동명 기자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저자 3인방

   (왼쪽부터) 김영동 기자, 신동명기자, 최상원 기자


  *본 후기는 저자가 직접 실제 '왜성' 취재 이야기를

   작성해주셨습니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언론스크랩 

<한겨레21> 『왜성 재발견』 신간 소개 -  http://goo.gl/WMHtPY

<한겨레> 왜성은 치욕의 물증 아닌 전리품이다 - http://goo.gl/6RitYW

<연합뉴스> [신간들춰보기] 『왜성 재발견』 - http://goo.gl/etKqfK

<전남일보>왜성,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 - http://goo.gl/LtTSOH

<경상일보> 왜성 31곳 발로 뛰며 확인한 임진왜란의 전리품 - http://goo.gl/eBXt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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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기] <왜성 재발견>후일담


EP.1 왜성이 뭐예요? 뭐 뭐예요?



“왜성이요?”


“예. 왜성이요.”


“근데, 왜성이 뭔데요?”


왜성을 취재하며 취재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왜성이 뭔데요?”라는 질문이다.

왜성을 취재하며 왜성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만 하는 답답함이란….

심지어 왜성 관리를 책임지는 지방자치단체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왜성이 뭔데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는 황당함을 넘어 버럭 화가 치밀기도 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용마산에 있는 마산왜성을 취재할 때다. 현재 마산왜성은 산호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기본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산합포구청 누리집(masanhp.changwon.go.kr)에 들어갔더니 ‘산호공원은 일명 용마산성이라 불리며 선조 25년(1572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착공하여 선조 30년에 완공했다’라고 되어 있었다.


'엉? 이게 무슨 소리야?'


조선의 선조 임금은 156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1572년이 선조 25년이라고? 선조 25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이니, 1592년을 1572년으로 잘못 적었나보다. 그런데 선조 임금이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고? 선조 25년부터 30년까지는 임진왜란이 한창 벌어질 때인데, 그 시기에 어떻게 왜군 점령지역에 성을 쌓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군이 이곳에 쌓은 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지?


▲ 마산왜성


마산합포구청 누리집은 ‘마산왜성’에 대해선 아무런 소개를 하지 않고, 대신 전혀 앞뒤 맞지 않는 ‘용마산성’을 언급하고 있었다. 누리집에 안내된 번호로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호공원에 대한 누리집 설명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아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인데, 그걸 왜구를 막으려고 조선이 쌓은 성으로 소개하고 있고, 쌓은 시기도 잘못된 것 같네요.”


“뭐라구요? 왜성이요?”


“예. 왜성이요.”


“근데, 왜성이 뭔데요?”


담당 공무원은 기자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왜성’이라는 단어를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는 오래전에 배운 것이라 외우지 못한다고 했다. 누리집에 소개된 내용은 예전부터 그렇게 되어 있던 것이라 출처를 모른다고 했다.


“내용을 확인해보시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보름가량 지나 마산왜성을 소개하는 ‘마산·고성·남해 왜성’ 기사 작성을 끝낸 뒤, 마산합포구청 누리집에 다시 들어가봤다.


‘산호공원에는 일명 용마산성이라 불리는 과거 성터인 마산왜성이 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마산의 용마산을 군사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축성을 시작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완공한 것이라고 전한다.’


고쳐져 있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소한 잘못된 것은 바로잡혀 있었다.

왜성 제일 높은 곳에는 천수대가 있었고, 천수각 위에는 왜장이 머물며 전투를 지휘했던 목조건물 천수각이 있었다. 현재 마산왜성 천수대에는 6·25전쟁 전몰군경 2039명의 위패를 모신 위령각이 서있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지역 기관장들이 이곳을 찾아 머리를 숙인다.


이곳이 왜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이런 일이 되풀이해서 일어날까?

왜성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그럼에도 왜성을 허물거나 복원해야 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글 | 최상원 기자

 


  ◀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저자 3인방

   (왼쪽부터) 김영동 기자, 신동명기자, 최상원 기자


  *본 후기는 저자가 직접 실제 '왜성' 취재 이야기를

   작성해주셨습니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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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역사를 바로잡는 

새로운 역사 인식의 현장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역사상에는 기쁨의 역사와 슬픔의 역사가 공존한다. 희비(喜悲)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재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도려낸 단정의 역사, 망각의 역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희망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에 대한 오해와 진실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조선에 침략한 직후부터 부산에 전진기지 구실을 할 성을 쌓기 시작했던 왜군은 1593년 남쪽으로 후퇴한 이후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진행하면서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았다. 1597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왜군은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확보하기 위해 울산, 경남, 전남 등에 추가로 성을 쌓았다.

 

_ '들어가며' 중에서 (p.13)

 

  임진왜란 7년 동안 왜군은 울산에서 전남 순천까지 동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았다. 현재 행정구역으로 왜성은 부산 11개, 울산 2개, 경남 17개, 전남 1개 등 모두 31개이다. 왜군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설치한 군사시설은 훨씬 많지만, 관련 학계가 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31개의 성이 전부이다.

  ‘왜성’이라는 명칭은 왜군이 쌓은 성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대부분 강이나 바다 근처의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독립된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왜성은 조선의 읍성과는 달리 겹겹이 둘러친 성곽을 바깥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로 뚫어야 하는 구조로, 방어하기에 좋은 성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동안 조·명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왜성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왜성은 존재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정적 인식을 주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만든 성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 치욕의 상징물이 인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군이 왜 왜성을 쌓았는지 그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면 그 인식은 바뀌게 된다.

 

  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이듬해부터 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은 것은 성에 의지해 조·명 연합군의 공격 등에 최대한 버티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하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성은 치욕의 상징물이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극복한 우리 조상이 자손들에게 당당히 물려준 전리품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p.14)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자 국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당당한 전리품, 왜성. 이제 왜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거두고, 새로운 역사 인식의 주춧돌을 놓을 필요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왜성을 사라지게 만들어…

 

  왜성은 16세기 말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이라는 한·중·일 동북아 3국간의 7년 국제전이 남긴 특수한 산물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에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왜성을 통해 현장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를 겪은 국민들 사이엔 왜성을 ‘조선이 침략해 쌓은 부끄러운 역사의 상징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삶의 터전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방치하게 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왜성이라는 존재조차 잊게 했다. 즉,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사람들에게 왜성의 존재를 지우게 한 것이다.

 

  박문구왜성은 용두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용미산에 있었다고 하는데, 부산항 매립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현재 용미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다. (…) 추목도왜성과 박문구왜성의 위치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개발 등에 휘말려 왜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들어선 건물 때문에 왜성 터로 추정되는 땅을 파헤쳐 조사할 수도 없다. 그렇게 왜성은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_ P.29

 

부산 박문구왜성 외 몇몇 왜성들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개발과 맞물려 왜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왜성은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어 우리 역사에 있어 미아가 될 뻔한 적이 있으며, ‘허물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주장이 일 때도 있었다. 다행히 현재는 지방기념물로서 타 문화재와 동등하게 보호받고 있으나 아직 학계와 언론의 무관심, 일반인들의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왜성을 통해 우리 역사의 아픈 과거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다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垓字)’가 발견된 것이다. (…)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우리 역사에서 잊혀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이 42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_ p.33~34

 

  부산도시철도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나온 81명의 유골, 성벽돌 없이 윤곽만 남아 있는 옛 동래읍성과 동래왜성, 그리고 전쟁 이후 쌓은 새 동래읍성 등은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증거물이자, 동시에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이어져 오는 한국사의 증거물인 것이다. 더불어 일반인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왜성은 우리네 삶 속에서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역사 교육의 훌륭한 교재가 되기도 하고, 나아가 국제적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크다.

 

  왜성은 16세기 한・일 관계사의 규명되지 않은 역사적 비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게다가 왜성은 일반인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이에 우리 가까이에 있는 왜성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_ ‘책을 펴내며’ 중에서 (P.5)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왜성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 것에 대해 저자는 “우리의 입장에서 왜성을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었다”고 전한다. 더불어 “ 편견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역사 인식의 시작”이라고 덧붙였다. 한반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왜성은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다. 우리 역사의 증거물인 왜성을 통해 선조들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고 반성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지은이 :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 차례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지음  | 신국판 | 15,000원 | 978-89-6545-360-4 03910 | 2016년 7월 15

 

왜성은 임진왜란이라는 420여 년 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블랙박스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에서 전남 여수까지 한반도 동남해안 일대에 분포해 있으며 이제는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일본 고유 양식 성곽의 원형이 남아 있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왜성은 임진왜란의 침략을 대변하는 유적으로 인식돼 홀대를 받아왔다. 이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은 31개의 왜성 전체를 취재하여, 임진왜란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책에서만 볼 수 있는 420여 년 전의 임진왜란, 왜성을 통해 역사가 되어버린 그날의 기억을 깨워본다. 

 

 

 

 

왜성 재발견 - 10점
신동명 외 지음/산지니

 

 

 

+ 신문스크랩 >> 420년전 역사 고스란히 간직한 '왜성의 재발견'(울산신문) 

 

+ [출간 전 미리보기] 사전답사 - 왜성 재발견 >> http://goo.gl/0HAr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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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5화 :: 왜군, 진해에 수군기지를 건설하다

-진해 웅천, 안골, 명동, 자마 왜성


 

 

  진해는 한·일 교류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전쟁 기간 내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격전지였다.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군이나, 왜군 본거지인 부산을 되찾으려는 조선 수군이나 진해 앞바다를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92년 5월7일 거제 옥포에서 벌인 첫 전투(옥포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달아나는 왜군을 진해 앞바다까지 쫓아가 왜선 5척을 격침(합포해전)시키고 회군했다. 같은 해 7월9일 한산도해전에서 또다시 대승리를 거뒀을 때도 조선 수군은 진해 안골포까지 왜군을 쫓아가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철수(안골포해전)했다. 조선 수군은 다음해 3월3일부터 4월3일까지 한달 동안 진해에 주둔해 있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7차례나 출격(웅포해전)했다.

 

  고니시를 중심으로 그의 사위이자 쓰시마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 여러 장수들은 진해에 웅천왜성, 안골왜성, 명동왜성, 자마왜성 등을 쌓아 조선 수군을 견제했다.

 

■ 왜군 제2거점, 웅천왜성

 

  웅천왜성은 해발 184m 진해 남산 꼭대기에 있다. 성벽 둘레 1250m에 면적 1만7930㎡로, 전체 왜성 가운데 울산 서생포왜성 다음으로 크다. 웅천왜성은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 등과 육로와 해로 모두 연락하기 좋은 위치에 있으며, 일본으로 철수하기에도 좋은 위치이다. 왜군은 이곳을 부산 다음의 제2거점으로 삼았다.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년)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와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됐다. 하지만 삼포왜란 때는 왜인들에게 함락돼 동문이 불탔고, 임란 때는 왜군에게 함락돼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사용됐다. 성벽 둘레에는 폭 4m가량의 해자가 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4차례 조사가 이뤄졌는데, 적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박아놓은 나무말뚝(목익)과 들었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나무다리(도개교)가 해자에서 확인됐다. 웅천읍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현재 동문인 견룡문과 주변 성벽이 복원된 상태이다. 경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돼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는 웅천왜성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웅천왜성에 초청하기도 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부산에 상륙해 다음날 웅천왜성에 와서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6개월가량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 왜성에 있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사목활동을 폈다.

 

 세스페데스 신부도 웅천왜성에 도착한 직후 일본의 포르투갈인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에게 보낸 편지에서 “웅천성은 난공불락으로 조만간 거대한 성벽과 망루와 치성을 가진 대단한 공사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근처에는 아우구스티뉴(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 휘하의 모든 중신과 병사, 동맹자, 종속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매우 잘 지은 넓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저택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라고 웅천왜성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소개했다.

 

 하지만 성의 웅장함과 달리 웅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왜군의 처지는 매우 곤궁했다. 조선 수군이 남해안 제해권을 철저히 틀어쥐고 있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사실상 조선 수군과의 맞대결을 포기하고, 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으로 버텼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에게 두번째 보낸 편지에서 “굶주림, 추위, 질병 등 일본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 가톨릭교도들의 고난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관백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식량을 보내준다 해도 이곳에 도착하는 양은 실로 보잘 것 없어서, 전군을 먹여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일본에서 지원은 이미 중단된 지 오래이며, 최근 2개월 동안은 도착한 배도 없습니다”라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 왜군 해군기지, 안골왜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웅천왜성을 쌓을 때,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은 해발 100m의 동망산 꼭대기에 안골왜성을 쌓았다.이들은 왜군 수군을 대표하는 장수들로,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조선 수군을 막기 위한 수군 기지로 삼기 위해 안골왜성을 쌓은 것이다.

 

  왜군은 안골왜성을 쌓을 때 인근에 있던 조선 수군기지인 안골포진성의 성벽 돌을 가져다 썼다. 안골포진성 서쪽 성벽 일부는 아예 안골왜성의 성벽으로 이용됐다. 안골포진성은 성종 21년(1490년) 건설됐다. 앞서 이곳엔 세조 8년(1462년) 김해 가망산에 있던 만호진이 옮겨와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임란 때 제포진성처럼 왜군에 함락됐다.

 

  안골왜성은 웅동만을 사이에 두고 웅천왜성과 마주보며, 부산의 길목인 가덕수로를 지키는 구실을 했다. 현재 가덕수로는 부산신항 건설로 매립돼 대부분 메워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안골왜성을 고적 ‘웅천안골리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현재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돼 있다.

 

 

  명동왜성은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1593년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진해 명동마을 주변 구릉에 쌓고, 소 요시토시가 주둔했다. 마쓰우라는 일본 규슈지역에 있던 히라도번의 번주로, 고니시가 사령관으로 있던 왜군 제1군에 소속돼 있었다.

 명동왜성은 진해만 동쪽과 거제만 북쪽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크게 4개의 성곽으로 이뤄져 있다. 명동마을 앞 바다에 접한 나지막한 구릉에 성곽이 하나 있고, 명동마을 뒷산인 성실봉 꼭대기에 또 성곽이 하나 있다. 성실봉 꼭대기 부근에 외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이 2개 더 있다. 명동마을 앞 구릉에 있는 성곽과 성실봉 꼭대기에 있는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축성됐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어느 성곽이 주 성곽인지도 불명확하다.

 

 

  웅천왜성의 또다른 지성인 자마왜성은 와성만 북쪽 해발 240.7m인 자마산 꼭대기에 세워졌다. 애초 이곳엔 삼국시대 때부터 산성이 있었는데, 소 요시토시가 기존 산성을 일부 고쳐 왜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거진 숲에 파묻혀 성곽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이지만, 산 위에서는 지금도 조선식 돌담이 발견된다. 자마왜성 터에서는 바다는 물론 웅천읍성 지역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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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4화 :: 왜장 가토, 우물 없는 ‘철옹성’에 갇히다

-울산왜성

 


 

 

 

■ ‘독 안의 쥐’를 놓치다

 

  “여러 적 중에 청정(淸正·가토 기요마사)이 가장 강하니 청정을 격파한다면 나머지 적은 셀 것도 못 되오이다.”

 

  임진왜란 6년째 정유재란이 터지던 해인 1597년 음력 섣달 그믐날, 조선 국왕 선조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 최고지휘관인 군문 형개(邢玠)를 만나 조·명 연합군의 울산전투 승전 상황을 축하하면서 “곧 가토를 사로잡게 됐다”는 형개의 말에 고무돼 이렇게 답했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설 쇠고 9일째 되는 날 선조는 이미 닷새 전 조·명 연합군이 왜군에 대한 포위를 풀고 경주로 후퇴했다는 ‘허무한’ 보고를 받아야 했다.

 

  이 울산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왜란 끝무렵인 1598년 9월 육군 3로군에 수군까지 합해 ‘사로병진’ 작전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울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순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사천 등 3곳의 왜군 본거지에 총공세를 펴기 9달 전 먼저 울산을 전략적인 공격목표로 삼아 집중공격함으로써 벌어졌다.

 

  1597년 12월23일 새벽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12일 동안 명군 4만여명과 조선군 1만여명 등 5만여명의 연합군과 울산왜성 일대 왜군 1만여명 사이에 치열하게 펼쳐졌다. 뒤에 출동한 6만여 왜군 구원병력까지 치면 조·명·일 3국의 12만 대군이 12일에 걸쳐 벌인 왜란 기간 최대 규모 전투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는 도원수 권율이, 명군 및 연합군 총지휘는 명군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가 맡았다. 왜군은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했다.1597년 9월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정유재란 이후 왜군의 승기를 꺾은 명과 조선은 다시 동남해안으로 쫓겨 수세에 몰린 왜군에 대한 막바지 총공세를 준비하면서 울산을 전략적인 우선 공격목표로 잡은 것이다. 왜군의 핵심 배후거점인 경상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조·명 연합군은 먼저 12월22일 언양과 태화강 하류 등 울산 외곽의 수륙 양쪽 길목부터 봉쇄한 뒤 23일 새벽부터 울산왜성을 포위하고 가토를 비롯한 성 안의 왜군 1만여명을 고립시킨 상태에서 이듬해 1월4일까지 대대적인 총공세를 퍼부었다. 가토는 애초 울산왜성에서 남쪽으로 35㎞ 가량 떨어진 자신의 본거지 서생포 왜성에 있다가 조·명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고 23일 밤 뱃길로 태화강 하류에서 조·명군을 피해 울산왜성으로 들어갔다. 수적 열세에 물과 식량까지 바닥난 왜군은 갈증과 허기에다 한겨울 추위마저 겹쳐 극한 상황 속에 궤멸 직전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끝내 울산왜성 내성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산, 김해, 양산 등에서 왜군 구원병력들이 속속 울산으로 출동해 그 수가 6만여명에 이르자 역포위를 우려한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의 포위를 풀고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명군이 후퇴하면서 부린 행패 때문에 인근 백성들 피해 또한 컸다. <선조실록>은 당시 명군 장수를 수행했던 접반사의 보고를 통해 “회군하는 군사는 다시 대오를 편성하지 못하고 그 행동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촌락에 들어가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고 부녀자들을 강범하며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 적이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어떤 마을의 노파는 울부짖으며 “굶주림을 참고 쌀을 찧어서 군량을 댄 것은 왜적을 평정하는 날을 기대해서인데 이제 도리어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살아갈 길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1598년 9월 사천·순천 왜성과 함께 울산왜성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9월21일 명군 제독 마귀는 2만4000여 군사를 이끌고, 별장 김응서의 5500여 조선군과 함께 먼저 동래를 공격해 부산 쪽 왜군과의 연결을 차단한 뒤, 가토의 1만5000여 왜군이 지키는 울산왜성 공성에 나섰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마귀는 25일 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가 10월6일 사천에서 명군이 왜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천으로 다시 후퇴했다. 11월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에 따른 본국의 귀환명령을 받고 가토와 휘하의 왜군들이 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난 뒤에야 마귀는 이 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 천수각과 우물이 없던 왜성

 

  울산왜성은 지금의 울산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에 있다. 울산 도심을 가로질러 울산만과 연결되는 태화강과 동천 하류를 끼고 있는 곳이다. 이 성은 왜란 초부터 울산 울주군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아온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군의 남하공세에 대응해 동쪽 최전선에 전초 방어요새로 쌓은 것이다.

 

  가토가 설계하고 부장 오다 가쓰요시(太田一吉)가 감독을 맡았으며 1만6000여명을 동원해 1597년 12월 울산왜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40여일 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기록됐다. 축성에 필요한 돌은 가까이 있던 경상좌도병영성과 울산읍성 성벽을 헐어 그 돌을 가져다 썼다.

 

  울산 중구 동·서·남외동 일대에 걸쳐 있는 경상좌도병영성(사적 제320호)은 1417년(태종 17년)부터 1894년(고종 31년)까지 존속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 영성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울산왜성 축성 때문에 파괴됐다가 왜란 뒤 몇차례 보수 및 복원공사가 이뤄졌으며, 현재 북문 터를 중심으로 동·서문 터까지 양쪽으로 성벽이 복원돼 남아 있다. 울산 중구 북정·교동 일대에 있던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쌓은 울산군수(종4품) 치소가 있던 읍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된 뒤로 현재 성곽이 남아있지 않다.

  울산왜성은 공사를 급히 한데다 축성이 끝나자마자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치르느라 본곽 안에 여느 왜성에 다 있는 지휘소 건물인 천수각이 없었다. 건물이라면 각 성벽 모서리마다 세운 12개의 전투용 누각과 거주용 막사 정도였다.

  정유재란 때 왜군 장수를 따라 조선에 파견된 뒤 이 왜성의 축성을 지켜봤던 왜군 종군승려 게이넨(慶念)은 일기에 당시 급박했던 축성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른쪽도 왼쪽도 성을 쌓느라 쇠망치소리 도끼질 소리로 잠을 이룰수 없다. 총을 쥔 사람, 깃발 든 사람, 뱃사람 할 것 없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오고 어슬렁거리는 자는 매를 맞고 때로는 적에게 목이 잘리우고…”

 

 

  울산왜성은 독립된 구릉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으로 성을 포위해 고립시키기는 쉬운 반면, 어느 방향에서도 공격로를 찾기 힘든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군은 전투 초반, 쉽사리 성을 에워싸고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끝내 성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명군 경리 양호를 수행했던 접반사 이덕형과 도원수 권율은 보고를 통해 “석축이 깎아지른 듯하고 토굴이 마치 벌집과 같은데 중국군이 위로 쳐다보며 공격해야하기 때문에 형세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이 성은 이처럼 외부 공격으로부터는 철옹성 같은 요새였지만 성 안에 우물이 없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의 전투 때 성 안에 고립됐던 왜군들이 갈증을 못 견디고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 물을 찾다가 매복해 있던 별장 김응서의 조선군에게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때문에 가토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에 성을 쌓을 때 포위된 상태에서도 군량과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도록 성 안에 우물 120여개를 파고 실내 다다미를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드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 성은 왜란 이후 한동안 조선 수군의 주둔지로 이용됐고 1624년부터 30년간 전함을 건조하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다. ‘울산학성’이란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때엔 조선 고적 제22호(1935년 5월)로, 해방 뒤엔 국가 사적 제9호(1963년 1월)로 지정됐다가, 1997년 10월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에 따라 ‘울산왜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울산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격하됐다.

 

  한삼건 울산대 교수(디자인·건축융합대학장)는 “원래 학성은 나말·여초 때 우리 옛성인 계변성 또는 신학성을 일컫는 것으로, 울산왜성 북쪽 맞은편 학성산에 있었다. 이곳엔 고려 말·조선 초의 옛 읍성도 있었고, 울산왜성 전투 때 조·명 연합군 지휘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조·명군 지휘부가 있던 학성산엔 2000년 7월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 희생된 울산지역 의병 239명과 그밖의 다수 무명의 위패를 봉안한 충의사가 세워졌다. 울산왜성은 왜란 당시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고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성’(甑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공간 구실을 하고 있으나 주변의 급속한 도시개발로 인해 본곽 동쪽 주출입구 주변의 성벽 등을 빼곤 아래쪽 제2곽과 제3곽 석축은 대부분 훼손돼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한삼건 교수는 “제3곽부터 성 아랫부분 석축은 일찌감치 조선시대부터 이미 뽑혀나갔을 것이다. 왜란이 끝난 뒤 경상좌병영성을 보수 또는 복원할 때 왜성 돌을 가져다 썼을 것으로 보인다. 병영성 돌이 왜성으로 갔다가 다시 병영성으로 돌아가기도 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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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3화 :: 왜구를 막았던 '신라의성'에 왜성이 들어서다

 -부산 구포·양산·호포 왜성

 


 

 

  시인 김용호(1912~1973)는 그의 대표 장시 <낙동강>에서 “칠백리 굽이굽이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고 했다. 유구한 세월을 도도히 흘러 남하하면서 반변천·내성천·영강·위천·감천·금호강·황강·남강·밀양강·양산천 등 여러 지천을 품어안고 멀리는 가야와 신라 천년의 영욕에서부터 가까이는 6·25전쟁의 참상과 4대강 사업에 따른 몸살까지 겪으면서 영남인들에게 삶의 젖줄이 돼왔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도 낙동강 수로는 왜군에게 진격, 후퇴, 방어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바닷길을 통한 서쪽 진격로가 봉쇄되자 왜군은 낙동강 하류 수로를 통해 서·북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길목인 김해, 구포, 양산 등지에 왜성을 쌓고 교두보를 마련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 때 왜군은 부산 동래에 집결한 대규모 병력을 이 수로를 이용해 진주로 실어날랐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도 1592년 7월 한산도·안골포 해전에서 왜 수군을 대파한 뒤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쫓아 이 수로를 따라 김해, 양산, 구포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 신라 장군 의기 서린 ‘의성’(義城)에 들어선 왜성

 

  부산 북구 덕천2동 산93 일대에 있는 구포왜성은 왜군 제6군 수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휘하 장수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임진왜란 발발 1년여 뒤인 1593년 7월 낙동강 수로 확보와 인근 김해·양산지역 왜성과의 연락 및 지원을 위해 쌓은 왜성이다. 금정산 상계봉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지맥이 끝나는 곳의 해발 75.7m와 36.5m 높이 두 구릉에 각각 본성과 외성을 쌓아 연결했으나 1970년대 낙동강교 건설로 단절됐다. 외성은 2005년 북구 문화빙상센터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다. 본성부 2만9548㎡만 보존돼 부산시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

 

  구포왜성은 상계봉 쪽 능선을 끊어 북동쪽으로 방어망을 치고 서쪽과 북쪽으론 낙동강 수로를 통해 김해와 양산 방향으로 나가고, 동쪽으론 만덕고개를 넘어 동래 방향과 연결되는 전략상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본성은 낙동강과 주변을 잘 관망할 수 있는 정상부에 본곽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두 단계 아랫쪽 주위까지 모두 5개의 성곽을 두르고, 그 아랫쪽에 다시 4개의 성곽을 배치한 형태다.

 

  본곽 주위 성곽은 60~70도로 비스듬히 쌓은 석축이 8~10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본곽 안에 성의 심장부요 지휘소 격인 천수각 터도 있다. 현재 본곽은 빈 터로 남아 있지만 주위 다른 성곽 터는 대부분 경작지 또는 사찰 터로 편입돼 관리 부실의 우려를 안고 있다.

 

 

 

■ 수륙교통 요지에 남긴 왜성

 

  양산은 조선 전기 경상좌도 남부의 중요 교통 요지로서 11개 속역을 거느린 황산역과 7개 원을 두고 있었다. 황산역은 조선시대 동래에서 한양까지 연결된 간선도로 구실을 했던 영남대로의 중요 거점으로서, 동래를 거쳐 올라온 관리들이 밀양이나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 됐다.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산1 일대의 양산왜성은 바로 이 황산역의 교통로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왜군이 쌓은 성이다.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 56-1 일대에 있던 호포왜성은 양산의 7개 원 가운데 호포원이 섰던 교통의 요지를 이용해 왜군이 거점을 마련했던 곳이다.

 

  양산왜성은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깨지면서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왜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남진하는 조·명연합군으로부터 부산의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양산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삼각주의 해발 133m 야산 두 봉우리 가운데 동북쪽의 높은 곳에 본곽을 쌓고 동북쪽으로 길게 부곽을 2개 붙였으며, 서남쪽으로도 능선을 따라 부곽을 5개 정도 길게 연결한 뒤 봉우리 쪽에 별도 중심곽을 배치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본곽 성벽은 4~6m 높이로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부곽 쪽은 허물어진 곳이 많다. 성벽 둘레는 1.5㎞ 가량 된다.

 

  본곽 동남쪽 아래 산기슭에도 별도 성곽이 남아 있는데 터가 모두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밭 곳곳에서 삼국시대 토기와 조선시대 옹기 파편 등이 발견됐다. 양산왜성은 ‘물금 증산리왜성’이라는 이름으로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로 지정돼 있다.

 

  이 왜성은 뒤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고쳐 쌓고, 구로다 죠수이(黑田如水)·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자가 주둔했다. 양산왜성이 있는 산은 부산의 증산왜성처럼 꼭대기를 깎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증산으로 불린다.

 

  지역 행토사학계에선 이 왜성도 구포왜성처럼 <삼국사기>에 ‘사도성’(沙道城)으로 기록된 삼국시대 성터에 축성한 왜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산왜성과 양산천 및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호포왜성은 현재 철저하게 훼손돼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다. 서쪽 전반부는 35번 국도와 촌락 및 농경지 개설로, 동쪽 후반부는 부산교통공단의 지하철 기지창 건설로 인해 파괴됐다. 호포는 금정산 서쪽 끝자락에 양산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 있던 교통 요지의 나루로서, 조선 전기까지 호포원이 있다 폐원됐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 자리에 왜성을 쌓아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포왜성은 축성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호포원은 당시 양산군에 있던 7개 원의 하나였는데, 이미 북정원과 함께 폐원된 상태였다. 원으로서의 가치가 약화됐거나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 때문에 폐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성은 물론 이에 앞서 호포원과 관련한 유구도 충분히 나올 만한 가능성이 큰 곳인데도 사전에 문화재 발굴조사도 없이 국도나 지하철 기지창 건설 공사가 강행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포원과 호포왜성은 그 이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개발 만능주의와 무지로 인해 소중한 역사문화자산을 잃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될 만하다.

 

>> 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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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의 내용은 책 본문의 내용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하였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0화-  왜성, 어디까지 알고 있니?

 


 

S#1. 2015년 12월의 산지니 출판사

 

 

대표님 : (신문 한 꾸러미를 주시며) 이 기사 한번 읽어보고 담당 기자님들께 연락해보는 건 어떤가? 왜성 관련 서적도 별로 없는것 같은데... 

 

기획 가뭄에 허덕이고 있던 단디SJ 편집자,

대표님께서 건내주신 한겨레 기사에 눈이 번쩍 뜨이다.

 

 

단디SJ : (혼잣말로)  그동안 왜성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성'으로만 알고 있는데...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증명하는 사실상 유일한 역사적 증거물이자, 16세기 말 우리 조상이 절체절명의 국난을 마침내 극복하고 얻은 전리품이구나!

 

인터넷을 통해 그동안 연재된 '왜성' 기획기사를 찾아본다.

 

단디SJ : 아픈 역사에 대한 외면이 왜성을 사라지게 만들었구나.

 

단디SJ는 부산 박문구왜성과 경남 양산시 호포왜성 편을 읽고 있다.

이 왜성은 관공서 건물과 지하철 기지창 건설 등 개발 바람에 휘말려 문화재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완전히 사라졌다. 나머지 왜성들도 대부분 묘지, 농경지 등으로 활용되면서 빠르게 훼손되고 있다. 멸실 직전의 왜성도 나타났다.

 

S#2. 2015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  

 

 

한 자 한 자 진심을 다해 출간 제의 메일을 쓰는 단디SJ 편집자.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누가 보면 애인한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는 줄 알겠다.

 

S#3. 2015년 12월 30일 (메일 발송 일주일 후)

 

단디SJ 편집자, 보낸메일함을 확인한다.

기자님은 메일을 읽었다. 하지만 답이 없다.

시무룩.

 

 

 

S#4.  2016년 1월 6일 (메일 발송 2주일 후)

 

대표님 : 거, 왜성 관련 해서 연락이 없는가?

단디SJ  : 네... 그러네요.

 

메일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산지니 출판사는 바쁘게 돌아갔다.

중국근현대사상총서를 비롯한 몇 권의 책이 나왔고,

출판사 식구들끼리 신년회를 가졌으며,

연말정산서류를 뗀다고 부산을 떨었다.

 

S#4.  2016년 1월 16일 (메일 발송 20 후)

 

여느때와 다름없이 메일함을 여는 단디SJ 편집자.

어딘가 반가운 메일주소에 오른손의 마우스질이 바빠진다. 클릭클릭!!

 

 

단디SJ : 아~ 메일이 왔어! 왔다고!!

 


 

 

2016년 4월 15일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는

독자 여러분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왜성'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한겨레> 기자 3인방이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31개 왜성을 심층 취재한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출간 전 여러분과 우리 지역의 왜성으로 사전답사를 떠나려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비회원

 

 

  지난 11월 18일(수) 부산 누리마루에서 열린'2015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미-일 신동맹시대, 동아시아 평화질서와 한반도'라는 주제로 18일, 19일 양일간 이어졌는데요. 저는 첫째날인 18일에 참석해 각 주제에 맞는 발표와 토론을 들었습니다. (아래의 일정표를 참고해주세요 :-D )

 

1일차 회의 "동아시아의 편화를 위한 동아시아의 제안"

 

기조연설 

동아시아의 평화를 동아시아가 할 일 - 자오치정 (중국인민외교학회 고문)

 

주제연설 

동아시아의 3중 패러독스와 그 극복을 지향하며 - 김준형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

 

제1세션 

미-일 신동맹 강화 움직임과 동아시아의 선택 - 사회 :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발표 : 새로운 세계의 출현 : 과연 좋은 소식인가? -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양대학 교수) 

         중국의 부상과 한미일 동맹 - 원동욱 (동아대 국제학부 중국학 전공 교수)

 

제2세션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남북 관계론 - 사회 : 박순성(동아대 북한학과 교수)

 

 발표 : 독일 통일의 교훈 - 기외르기 스첼(독일 오스나브뤼크대학교 명예교수) 

          중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와 새로운 남북관계 건설 - 진창이(옌벤대 국제정치연구소 소장)

          한시적 두 국가 해법과 동북아에 미치는 영향

           - 토니 남궁 (전 미 UC버클리대 초대 동아시아연구소 부소장)

          남북관계 개선과 동아시아 평화 : 우선 순위의 전략적 재설정 - 길정우(새누리당 국회의원)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로 :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과 북방경제협력

           - 홍익표(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현 시기 바람직한 통일론의 조건 - 박창식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

 

2일차 회의 "해양으로부터의 평화"

 

제3세션 

부산 항만도시의 재발견 - 사회 : 김춘선(인하대 교수, 전 인천항만공사 사장)

 

발표 : 오래된 배, 메리로즈호에서 탄생한 새로운 박물관 - 알렉스 힐드레드(영국 메리로즈 박물관 큐레이터)

         항만 재생의 미래 - 김정후 (유니버시티 칼라지 런던 교수, JHK도시건축정책연구소장)

         공생공존과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북항재개발 : 시민은 어떻게 참여하는가?

           - 김태만 (한국해양대 국제대학 학장)

         북항의 신 활력, 그 가능성 찾기 -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제4세션

광복 70년, 해양 질서의 변화와 동아시아 평화 - 사회 : 이석용(한남대 법과대학 교수)

 

발표 : 전후 동북아 해양질서의 전개 : 지역 협력의 진전과 향후 전망

         - 이창위(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동북아 해양경제력의 변화와 전망 - 손재학(국립해양박물관장)

        중국의 남중국해 정책과 지역협력 - 이정태(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러시아의 동아시아 해양 정책 - 안드레이 시도로프(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 교수)

 

   한국, 중국,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상호의존관계가 높은 3대 경제 체제로 지금까지 서로의 교류를 통해 모두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국제사회의 새로운 질서와 정책에 극심한 차이를 보이며 평화로운 국제 관계에 적신호가 켜졌는데요,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중국의 부상

  탈냉전 이후 국력 강화에 수반되는 중국의 영토적 자아정체성과 핵심 이익관의 확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기존의 동아시아 질서 구도를 동요시키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글로벌 차원에서의 협력증대와 갈등 심화의 역설적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요, 다시 말해 거시적 차원에서 양국 간 상호 협력의 필요성은 공유되고 있지만, 지정학적 요충지 및 전략적 거점을 둘러싼 구체적 사안과 관련해서는 상호 경쟁 및 대립이 존재할 뿐 아니라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두번째, 미-일 신(新)동맹

  최근 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마찰은 물론이고 역내국 간의 세력 재편에 따른 갈등에다가 국내 정치적 이유로 말미암은 외교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일본 아베정부의 군사대국화 행보와 우경화 드라이브입니다. 지난 4월 28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했는데요, 이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유사삼각세력 패러독스를 야기하며 한, 중, 미, 일의 관계에 긴장을 증가시키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세번째, 한반도의 긴장과 대결의 심화

  탈냉전이 도래했고, 남북한의 국력은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음에도 통일이나 평화 공조의 가능성은 오히려 멀어지고 한반도는 여전히 대결과 긴장이 심화되면서 냉전의 분단시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는 미-중 및 아시아 패러독스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는데요, 즉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미동맹에 있어 군사적 요소가 지배하고 있으며 남북은 물론이고 동북아 전체의 안보 딜레마와 군비 경쟁이 초래되고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거론한 동아시아 평화를 저해하는 두 가지 요소들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일어나게 합니다.

 

  18일에 있었던 세션들은 위의 세가지의 현상들을 바탕으로 현 동아시아의 정세와 극복방안, 한국의 대응전략, 남북의 새로운 관계 설정 등의 발표로 이어졌습니다.       

 

 

 심포지엄은 자오지청(중국인민외교학회 고문)의 기조연설을 시작으로, 후쿠아마 신고(포럼 평화, 인권, 환경 공동대표)와 김준형(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의 주제연설로 이어졌습니다. 각각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일, 아베정권의 방향과 일본 내 평화운동, 동아시아의 3중 패러독스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연설하였습니다. 

 

 

  제1세션에서는 이장희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의 사회로 미-일 신동맹 강화 움직임과 동아시아의 선택이라는 주제로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양대학 교수는 지역 패권국가(가 될 가능성이 큰) 중국과 한-미 동맹의 불확실한 미래, 한국의 통일 문제를 거론하며 동아시아 공동체와 평화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공격적인 국수주의와 역사적 통계에 입각해 다소 비관적인 결론을 제시했습니다. 이어 원동욱 동아대학교 국제학부 중국학전공 교수는 중국의 부상과 한미일 동맹의 구조적 배경과 각 나라들의 인식에 대한 관점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중국의 부상,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조합, 동아시아의 질서를 키워드로 이 속에서 한국만이 할 수 있는 균형자(혹은 중립자), 적극적 소통자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설했습니다. 

 

 

  제2세션에서는 박순성 동국대학교 북한학과 교수의 사회로 남북의  관계 개선과 이를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주제로 진행됐습니다.

  독일의 통일 사례를 통한 한국의 통일을 위한 준비(기외르기 스첼 독일 오스나브뤼트대학교 명예교수), 중미 전략게임 속에서 짚어본 한반도 문제와 남북의 새로운 관계 모색(진창이 옌벤대학교 국제정치연구소 소장),  남한과 북한의 한시적인 통일의 해법과 동북아에 미치는 영향(토니 남궁 전 미 UC버클리대학교 초대 동아시아연구소 부소장),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우선순위와 재구성(길정우 새누리당 국회위원), 한국경제 현실과 남북경협의 필요성 그리고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홍익표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언론의 시각에서 본 현 시기의 통일론의 조건(박창식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인이사)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이후, 발표와 토론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습니다. 몇 개의 질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어느 고교생의 질문이었는데요,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오늘 하루종일 동아시아의 평화, 남북문제에 대한 국제관계와 외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곧 동아시아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소년들이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와 경험이 필요한가?"

 

  제2세션 토론자 6분과 사회자는 이 당찬 청소년의 질문에 미소를 보이시며 "국내외 신문 읽기와 독서"를 권해주셨는데요, 다소 진지하고 딱딱하게만 흘러갈 수 있었던 심포지엄에서 엄마 미소()를 띄울 수 있게 했답니다.

 

  끝으로, 이 질문을 했던 친구를 비롯해 '차세대 글로벌 리더'인 청소년(및 청년)들에게 산지니 책 몇 권을 권해드립니다.  

 

 

글로벌 차이나 - 10점
이종민 지음/산지니

 

 

이데올로기와 미국 외교 - 10점
마이클 헌트 지음, 권용립.이현휘 옮김/산지니

 

추락하는 제국 - 10점
워렌 코헨 지음, 김기근 옮김/산지니

   

Posted by 비회원

 

 

어제였죠? 10월 29일(목)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님의 강연을 다녀왔습니다.

퇴근 후라 꽤 날이 차가웠는데도 신문 광고를 보고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셨더라고요.  

 

강연의 주제는 '신경숙 작가 표절과 문학 권력'이었습니다. 

지난 6월 신경숙 작가의 표절 이후

현재는 문학의 권력에 대한 쟁점으로 옮겨갔는데요. 

 

이에 대한 최재봉 기자님의 날카로운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강연은 크게

1. 요산 김정한 선생의 작품세계 - 참여적 사실주의 문학

2. 신경숙 작가의 표절 그 이후 - 문학 권력

의 내용으로 진행됐습니다.

 


 

1. 요산 김정한 선생의 작품세계  

 

   최 기자님께서는 오랜만에 부산에 오면서 요산 김정한 선생의 작품을 다시 읽으셨다고 합니다. 역시 우리 문학의 참여적, 비판적 사실주의, 진보 문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라는 것을 느꼈다며 강연의 운을 띄우셨습니다.

 

   특히 <사하촌>과 절필 이후 문단 복귀작인 <모래톱 이야기>를 거론하셨는데요, 먼저 <사하촌>에서는 소작농이 된 사람들의 핍박받는 현실과 말미에 이러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래톱 이야기>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주인공 소년 건우에게 하는 말, 건우 할아버지의가 자신의 땅을 유력자들, 권력자들에게 뺏기고 시달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대목 등에서 민중의 처지와 삶을 보여주는 요산 선생의 문학 정신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글을 읽어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핍박받는 현실에 분개하는,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저항적인 문학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며 소설 속의 사실적인 부분에 대해 강조 하셨습니다.  

 

   "1966년, 요산 김정한 선생의 문단 복귀와 창작과 비평의 창간"

 

   요산 선생은 36년 등단 후, 40년 이후 절필. 66년에 다시 복귀를 하셨습니다. 1966년 그 해, 창작과 비평(이하 창비)가 창간 되는데요, 요산 선생께서 참여적 사실주의 문학을 일궈가는 시점과 창비의 참여 진보적 문학과의 시점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산 선생이 문단에 복귀하며 쓴 작품들은 가라앉은 참여 문학을 다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고 이후 70년대부터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들,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문학이 든든하게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창비가 있었고, 창비는 그런 문학들을 적극적으로 개제, 출판, 착가 후원을 왔습니다.

  

2. 신경숙 작가의 표절 그 이후-문학 권력 

 

  내년이죠? 2016년은 창비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5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창비. 그러던 와중에 최근에 여러가지 상황들이 벌어진 셈이죠. 최 기자님께서는 신경숙 작가의 표절 그 이후, 지금 현재 상황이 어떻게 와 있는지 설명하시며 메이저 출판사(문학동네,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의 문학 권력을 비판하셨습니다. 그중 특히 창비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이어가셨는데요, 특히 창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창비 내부의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신랄하게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신경숙 표절 행위가 창비의 문학 권력으로 이동한 데는  창비의 책임이 크다고 설명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하셨습니다.

 

- 백낙청 선생의 1인지배체제의 지속화가 낳은 권위주의

- 작가 신경숙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두둔

- 창비의 진보적, 비판적 문학관의 포기

 

   신경숙 사태 이후 문학동네(이하 문동) 가을호에서 작가 토론회(좌담)를 열었습니다. 사회는 신영철 평론가가 봤는데, 그의 발언 중 "출판사들 사이의 교집합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최 기자님께서는 이 부분을 해석하자면 출판사들 사이의 차이점이 크게 없어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문동이나 문학과 지성사(이하 문지)가 창비 쪽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문제는 창비는 문학주의, 문학지상주의, 문학을 위한 문학과 같은 태도가 아닌 문학에 담기는 내용. 그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색깔을 잃어버렸다는 점에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미학과 메시지, 문학은 양쪽을 같이 가져가야 한다."

 

    현재 문학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창비는 조금 더 현실에 참여적이고 전투적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거론하며, 미학적 완성도 치우쳐서 커다란 것(사회, 인류)들을 놓쳐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든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최 기자님께서는 이런 점에서 올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작가는 논픽션을 쓰는 작가로 전쟁,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 등 인류사의 큰 사건들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은 목소리의 소설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관련자들을 적극적으로 인터뷰를 하고 그 중에서 그 목소리들을 꺼내서 자기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만약 이런 작품이 노벨상을 받기 전에, 한국 평론가들이 봤다면 뭐라고 이야기했을까? 미안하지만 '그건 문학이 아니다. 언론이다'라고 이야기 했을 것 같다고 답하셨는데요. 이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소재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대단히 문학적인 터치와 소화를 했다는 점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상상력으로 꾸려내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아픈 목소리들을 끄집어 냈고 작가가 자기 스타일을 내서 소화를 합니다. 스타일, 소재, 현실 등 이런 것들이 문학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죠.

 

   우리는 '문학적이다'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최 기자님께서는 직접 현실 속에 들어가 마주보는 르포와 같은 글쓰기의 필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현재, 르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꽤 많지만 문제는 우리 문화에서는 이것을 문학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신경숙 표절 이후, 지금 한국 문단은 어디에 와 있는가?

그리고 창비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창비가 살 길은 창비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수용해서 편집위원들이 다시 짜는 것이라고 말하며 창비 이외의 좋은 문학 잡지들을 소개하셨습니다. 먼저 <실천문학>은 8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자신의 출발에서 지켜나가야 하는 것들을 놓치고 있지 않다고 하셨고, 이어 부산에서 나오는 계간지인 <오늘의 문예비평>을 거론하셨습니다. 이 두 권의 잡지를 이야기 하시며 창비나 문학동네만큼 유명하고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좋은 잡지들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잡지들을 응원하고 구독해주며 호응해주는 것이 창비와 같은 메이저들을 자극하고 본연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5년 현재, 우리 사회는 80년대 못지않은 위기와 절망의 시기라 생각한다. 문학이 그것에 비하면 너무 태평스럽고 한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창비가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진보적이고 참여적인 작품의 큰형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의 문예비평 2015.가을 - 10점
산지니 편집부 엮음/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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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과 20세기 동양적 혁명을 논하다

유원표 지음, 이성혜 역주/산지니·2만원

한 기업한테 3000만원을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총리 자리가 위태롭다. 만일 제갈량이 살아와 그 자리에 앉는다면?

1906년 조선의 ‘계몽 지식인’ 유원표가 그런 시도를 했다. 황제도, 무당도 아니요, 한낱 글쟁이인 터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꿈꾸기다. 그 결과가 ‘꿈속에서 제갈량을 만나다’(<夢見諸葛亮>)라는 제목의 책이다. 일부에서 ‘몽유록계’라 하여 소설 범주에 넣기도 하는데, 대화체를 빌린 계몽서다.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나 가업을 이은 유원표는 승문원에서 역관으로 15년 이상, 군부대 통역관으로 10여년 근무하다가 1906년 54살에 퇴직하여 개성에 정주한다. 그는 <황성신문> 등에 시국에 대한 글을 다수 기고하는데, 이 책은 그의 유일한 저서다. 퇴직 후 그의 모든 역량을 들여 쓴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논자들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함(議者謂爲非計), 아마도 괴이함이 없이 용납될 것임-10조목(容或無怪十章), 선생의 역사 연의(先生歷史演義), 동양문학의 허와 실(東土文學虛實), 황백인종 관계의 진상(黃白關係眞狀), 중국 정략의 개량(支那政略改良) 등 6개 장으로 되어 있다. 앞 4개 장은 1700년 전 제갈량(181~234년)의 공과를 다투는 내용으로,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조조를 풀어준 관우는 그대로 두고 전투에서 한차례 패한 마속의 목을 벤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 승상으로 뭐든 할 수 있었으니 상하 양의원을 만들어 언로를 틔울 수 있지 않았느냐 등등의 지적질이다. 뒤 2개 장이 가관인데, 앞 4개 장을 합친 것보다 많은 분량으로 인간 유원표 내지는 계몽 지식인의 두뇌구조를 보여준다.

‘황백인종 관계의 진상’은 서세동점 시대를 당하여 한·중·일이 힘을 합쳐 이를 물리치자는 내용으로 당시 일본 지식인의 생각을 답습하고 있다. 그런 논리에 따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두고 “장하다” “시원하다”는 표현을 한다. 마지막 장이 하필 ‘중국 정략의 개량’이다. 조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게 아니라 중국의 살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중국이 살면 자연히 조선도 살 것이라는 사대주의가 깔려 있지 않고서야….

꿈 깨시라. 제갈공명의 궁량은커녕 계몽 지식인의 혜안도 없다. 강대국 등쌀에 바람 잘 날 없는 나라의 형편을 목도한 당대 지식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들여다볼 ‘궁핍한 창’이라고나 할까. 이인직·이광수 등 친일로 나아간 문인들의 단초가 보인다.

신채호 서문이 뜻밖이다. “천만번 제갈량을 꿈꾸는 것이 한번 소학교 아이가 되기를 꿈꾸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며 에둘러 비판하는 것이 마지못해 쓴 흔적이 역력하다.

임종업ㅣ한겨레ㅣ2015-04-16


제갈량과 20세기 동양적 혁명을 논하다 - 10점
유원표 지음, 이성혜 역주/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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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노용석 지음/산지니/18,000원

 

 

 

올해 2월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에서 한국전쟁 시기 학살당한 국민보도연맹원들의 유해를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펼쳐졌다.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전쟁유족회 등 민간단체들이 ‘공동조사단’을 꾸려서 한 일이었다. 이들은 단체 분담금과 후원회비, 시민 모금으로 재정을 충당했고, 첫 발굴에서 35구의 유해와 유품들을 찾아냈다.

2010년 말 해체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유해발굴팀장을 맡았던 노용석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인문한국(HK)연구교수도 공동조사단에 참여했다.

할 일을 잔뜩 쌓아두고 활동을 끝내버린 진실화해위는 우리 사회에서 ‘못다 한 과거청산’의 상징적인 이정표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국가를 강제할 수 있던 존재가 사라진 뒤, 과거청산의 과제는 다시 시민단체의 손으로 넘어왔다. 노 교수는 이 책에서 국외 사례를 통해 이런 우리의 현실을 곱씹는다.

지은이는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의 과거청산 경험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엘살바도르는 1980~81년 무장 게릴라 단체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과 정부군 사이의 내전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이틀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민간인 400여명이 정부군한테 죽는 ‘엘모소테’ 학살 등 끔찍한 국가폭력이 횡행했다. 1960~1996년 내전이 꾸준히 계속된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마야 원주민들을 주된 학살의 대상으로 삼는 ‘제노사이드’의 모습까지 보였다.


 ‘공산주의 도미노’를 막고 싶었던 미국은 이들 정부의 최대 후원자로서 막대한 군사자금을 댔다. 미·소 양대 진영의 대리전처럼 치러졌던 한국전쟁과 그 질곡에 빠진 한국 현대사처럼, 이들 나라에서도 ‘냉전’과 과거청산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나라가 과거청산을 끌고 나가고 있는 방식이다. 엘살바도르에선 유엔의 중재로 1992년 민족해방전선과 정부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과거청산이 시작됐다. 진실위원회가 만들어져 최종보고서를 냈지만, 당시 집권여당이 ‘대사면법’ 등으로 원천 봉쇄해 가해자 처벌 같은 성과는 내지 못했다. 그러나 지은이는 과거청산을 계기로 민족해방전선이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어 끝내 정권까지 접수한 현실에 더 주목한다. “과거청산은 국가의 ‘미래 발전전략’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테말라의 경우 1996년 ‘민족혁명연합’(URNG)과 정부 사이의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과거청산을 시작했다. 역시 가해자 처벌 등의 성과는 제대로 거두지 못했지만 지은이는 시민사회가 과거청산을 주도해서 이끌어가고 있는 모습에 주목한다.

이들 사례는 ‘과거사’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민주주의와 직결된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지은이는 “과거청산은 개혁과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기 위한 가장 강력한 ‘현실정치’”라고 말한다.

 

한겨레│최원형 기자│2014-06-09

원문 읽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41364.html

 

라틴아메리카 오형제를 소개합니다 ─ 중남미지역 총서 5종(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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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와 문학
오길영/충남대 영문학과 교수

2014. 01. 03 자 한겨레 칼럼

 

 

 

 

화제작 <변호인>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송우석 변호사와 고문경찰 차동영이 맞서는 ‘국가론’ 법정 논쟁이다. 송변에게 국가는 주권자인 시민이다. 차동영에게 국가는 정권이다.


이 영화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묻는 시선의 현재성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종종 시민은 주권을 위임받은 국가권력에 지배당한다. 대의의 한계다. 차 경감이 사로잡힌 뒤틀린 국가주의의 탄생이다. 뛰어난 문학과 영화는 다른 애국주의를 말한다. 국가나 정권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헌법에 충성하는 “헌법적 애국주의”(하버마스). 민주공화국의 헌법보다 앞서는 국가나 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파멸적 결과는 매카시즘을 낳았다. 매카시즘은 그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가 생생히 문학적으로 증언하는 전후 현대사의 교훈이다. ‘종북몰이’의 원천인 매카시즘의 문제는 선의 편인 ‘나’와 악의 편인 타자를 선명히 나누는 이분법이다.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김현) 권력이 뻔뻔하고 오만할 때 국가폭력이 발생한다. 문학과 영화는 그 폭력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천운영의 <생강>은 고문기술자 ‘안’과 딸 선이의 내면을 번갈아 파고들지만, 고문의 세세한 실상이나 ‘적’에게는 잔인한 고문을 하면서도 자신의 가족에게는 자상한 ‘안’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작품은 ‘안’ 같은 자칭 ‘애국주의자’가 드러내는 빈곤한 자기성찰의 모습을 강조한다. “그것들이 악이고 내가 선이다”라고 믿는 오만함과 “악을 처단”하는 것에 추호의 주저함이 없는 단호함으로 무장하고, “그냥 딱 보면 빨갱이”인 줄 아는 신통력을 지닌 국가폭력의 탄생.


‘국민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조갑상의 <밤의 눈>도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치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비극적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데만 있지 않다. 작가는 절제된 스타일과 어조로 국가의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이 희생시키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다. “사람 하나가 별거 아니라니? 난세니까 사람 목숨 하나가 더 중한 기다! 그리고 삼라만상에 끝이 없는 시작이 없는 건데 사람이 나중 생각도 해야지!”(<밤의 눈>) 중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다. 시민을 위해 국가가 있지, 그 역이 아니다. 인물의 묘사와 서사의 전개가 아주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에는 그런 상투성을 뛰어넘는 독특한 기운이 있다.


애국주의자에게 국가는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다. <변호인>이나 <밤의 눈>이 보여주듯이 시민은 국가의 이름으로 언제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사회적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문학과 영화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애국주의는 진리를 독점하려 한다. 문학과 영화는 확정될 수 없는 진리의 가치를 밝힌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 진리라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 자체는 신에게 맡겨라.”(한나 아렌트)


어떤 권력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문학은 거창한 정치이념이 포착하지 못하는 개별적 삶의 가치를 새기고, 개인들의 모둠살이로서 사회나 국가의 관계를 되묻는다. <변호인>, <생강>, <밤의 눈>을 보고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8262.html

 

 

『밤의 눈』 2013 만해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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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니는 오래 버티는 매

출판사 작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하겠다. ‘산지니’는 산속에서 자라 오랜 해를 묵은 매로서 가장 높이 날고 가장 오래 버티는 우리나라의 전통 매를 뜻하는 이름이다. 전투적인 이름이지만 이 이름은 80년대 대학생활 시 대학교 앞에 있던 사회과학서점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시절에 그 서점에서 사회에 대한 관심을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고, 그 기억이 나에게 산지니란 이름을 가슴에 새기도록 해주었다. 또한 이름을 통해 망하지 않고 오래 버티고 싶은 꿈도 담았다고나 할까. 이름은 듣기 쉽고 외우기 쉽고 말하기 쉬워야 한다는데, 이름이 어려웠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뜻인지 물어왔다.

덩그러니 사무실만 열었을 뿐 원고 하나 없이 출발해서 여러 사람을 만나러 다녔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번역 출판을 해야겠다 싶어 출판사를 차린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에이전시를 통해 번역서를 검토하던 중 마음에 드는 책이 있어 판권을 문의하였다. 일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내용이 괜찮았다.

그러나 일본 출판사로부터 받은 답신은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 있는 출판사가 어떻게 번역 출판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결국 그 번역 출판 건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 일은 나에게 Local First를 출판철학으로 가지게 만든 사건이었고 이후 지역(local)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2005년 10월, 출판사를 차리고 8개월 만에 첫 책이 나왔다.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 『반송사람들』 두 책이었는데 홍보를 위해 지역신문사 문화부 기자를 찾아갔다. 처음으로 신문기사가 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기사는 두 책에 대한 내용보다도 부산에 이러이러한 출판사가 생겼으니 많은 관심과 발전을 바란다는 요지였다.

홍보를 위해 책 두권을 들고 부산 동보서적을 찾아갔는데 서점 관계자가 표지디자인이 촌스럽다고(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애정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요즘은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겉표지는 더 중요하다고. 그래야 독자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며.


서울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출판사가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지역(local)에서는 출판사를 설립한 것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되는 현실, 이게 바로 지역출판의 현실인가 싶어 자조적인 웃음이 나는 것과 동시에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결심 또한 생겨났다.

한 달에 한 권 정도 꾸준히 책을 발행하면서 전국 일간지 기자들에게 계속 책을 보내다보니 “웬 지역출판사에서 이렇게 꾸준히 책을 내나?” 싶어 관심을 가져주는 기자들이 생겨났다. 이게 바로 지역출판사의 이점이라면 이점이다. 한겨레신문사의 임종업 선임기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서울에 올라오면 한번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다. 마침 서울 쪽에 있는 서점을 돌아볼 일이 생겨 올라간 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장시간 동안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기자의 질문은 역시나 날카롭기도 하고, 이것저것 묻는 것도 많았다.

어쨌든 한겨레신문에 기사가 크게 나고부터 지역신문사 기자들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후 동아일보, 부산일보, 한겨레21, 출판저널, 연합뉴스, 국제신문 등과 인터뷰를 하고, 기사도 실렸다. 없던 원고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론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음글에 계속)

●지역에서 출판하기(1)
지역에서 출판하기(2)
지역에서 출판하기(3)
지역에서 출판하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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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지니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