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체 게바라가 죽었다. 미국 CIA의 사주를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처형을 당한 것이다. 학교 교실 한쪽 구석에는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이 놓여 있었는데,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짐승의 위장처럼 배낭은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볼품없는 배낭 속에서는 필름, 지도, 무전기 등과 함께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의 노트 한 권이 나왔다. 두 권의 비망록은 훗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체 게바라의 일기>였는데, 나머지 한 권의 녹색 스프링 노트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체 게바라의 녹색 노트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는데 최근에서야 그 안에는 체 게바라가 직접 옮겨 적은 69편의 시가 들어 있음이 밝혀졌다.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는 중남미 시인이자 남미 전문가인 구광렬 울산대 교수가 녹색 노트에 들어 있던 그 69편의 시를 매개로 체 게바라의 일생을 들여다본 것이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도 10년이나 지나가는 지금, 지구촌에서 체 게바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불꽃처럼 살다 간 혁명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혁명을 꿈꾸며 자신의 온 생애를 다 바친 이 남자 체(이 남자는 자신이 체로 불리는 걸 좋아했다. ‘체’는 “이봐, 친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누군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를 생각하면 불온하고 음습하며 무언가 반역적인 혁명이 아니라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며 꿈을 꾸는 듯한 혁명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40여 년 동안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를 이끌었지만 쿠바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체 게바라이다.
본명이 에르네스토 게바라인 체는 아르헨티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고물 오토바이 ‘로시난테’를 타고 남미 구석구석을 여행했던 경험은 감수성이 예민했던 체로 하여금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남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싹트게 만들었으며, 이는 이후에 혁명에 뛰어들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아메리카에서 문명을 이루고 살던 인디오들을 학살한 이후 남미는 언제나 제국주의자들의 희생양이 되어왔다. 18세기,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제국주의자들은 그 모습만 달리했을 뿐 그 땅에 터전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가난했으며 무언가를 빼앗기고 살았다. 아르헨티나인인 체 게바라가 왜 쿠바에 가서 혁명을 하고자 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체에게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이라면 남미 어디든지, 아니 세계 어디든 구분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래서 체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아프리카 콩고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이후 볼리비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쿠바 혁명을 위해 싸우던 시에라 마에스트라 전선의 막사 안에서 시가를 문 채 괴테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 사진이 남아 있을 정도로 체는 언제 어디서나 책을 읽었다. 어려서 천식으로 기도가 막혀 숨을 쉬기 힘들 때도 침대 위에 책상을 올려놓고 팔꿈치를 괴고 앉아서 책을 읽곤 했다. 책은 천식의 고통조차 덜어주는 것 같았다고 주위 사람들은 회고했다.
어려서부터 독서광이었던 체는 그 어떤 문학 장르 가운데 특히 시를 사랑했다. 직접 시를 쓰기도 했지만 자신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고 위대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등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는 걸 좋아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장에서 직접 필사한 시들은 체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어주었던 듯하다. 녹색 노트의 시들은 네루다를 비롯하여 안데스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 쿠바의 국민시인 니콜라스 기옌, 스페인 시인 레온 펠리페 등 네 사람의 것들인데, 이 가운데 이미 세상은 떠난 바예호를 제외한 나머지 시인들은 체가 죽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발표했다. 체의 녹색 노트에 자신들의 시가 들어있음도 모른 채.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인들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체는 사후에 ‘라틴아메리카의 돈키호테’라는 별명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이 체를 무모한 돈키호테라 여겼지만 정작 그는 돈키호테를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모험가’라고 생각했다. 체가 필사한 67번째의 시 「대모험」은 레온 펠리페가 돈키호테의 이상을 묘사한 것인데, 거기에서 돈키호테는 평화의 천사가 나타나 자신의 투구를 가져가버리고 대신 빛의 왕관을 받는 경이로운 경험을 한다. 체의 이상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무기를 상징하는 투구가 사라지고 빛이 지배하는 세상. 정의가 넘치는 세상. 체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평안함과 안락함을 내던지는 걸 주저하지 않았고, 전장에서도 시와 낭만을 잃지 않던 휴머니스트 혁명가였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애용되고, 체의 이름을 딴 맥주가 출시되며(실제로 체는 술을 잘 못 마셨다), 체가 죽은 볼리비아엔 해마다 성지 순례자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안티-체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체가 죽은 다음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들이 많았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시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자본의 편이 아닌 민중의 편에 섰던 그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의 여부는 차치하고, 자신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그 열정이 바로 세계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이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져버릴 수 있는 열정. 소소한 일상에 파묻혀 사는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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