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낙은 <소설처럼>이라는 책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 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사람이 책을 읽는다는 건 가장 개인적인 행위이고, 그 누구도 그 즐거움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9년째 뜻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책을 같이 읽어오고 있는 저로서는 우리 아이들의 책읽기 현실이 그러지 못함에 대해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이러저러한 독서교육의 모습이 강요의 형태를 띨 때 우리 아이들이 오히려 책읽기의 즐거움에서 멀어질까봐 두렵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부산·울산·경남 지역 대학들은 입학전형에 중·고교 때의 독서활동을 반영하겠다고 선언했답니다. 가장 즐거워야 할 책읽기가 평가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겁니다. 나 또한 아이들에게 은근히 책읽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습니다.
각설하고, 출판 편집자는 위에 열거한 권리를 누릴 수가 없다는 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편집자가 원고를 건너뛰며 읽을 수도 없고, 끝까지 읽지 않을 수도 없고,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 책을 만들면서 절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원고에는 정말 건너뛰며 읽고 싶은 부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90여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우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옛날 낙화암에서 삼천 궁녀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건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바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할 당시의 일입니다. 서로에게 겨누어진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한 마을의 여자들이 우물에 뛰어들기로 결정합니다. 아이들은 먼저 우물 속으로 던지고 엄마는 뒤따라 몸을 던집니다. 우물이 가득 차서 물에 잠기기 못해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실제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이 증언한 것입니다.
또 어떤 남자는(그 사람의 집안은 시크교도였습니다. 시크교도는 명예를 가장 중요시한다고 알려져 있지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누이를 포함한 집안의 17명 여자들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전합니다. 그 남자는 여자들의 희생을 ‘순교’라고 표현하고, 그런 결정을 한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명예를 위해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느냐고 말합니다.
인도-파키스탄 국경의 난민들(사진제공-이광수)
살육의 많은 부분은 공동체의 ‘명예’라는 명목 하에서 일어났습니다. 힌두와 무슬림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상대방에게 치욕을 주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여성의 납치와 강간이었습니다. 실제로 75,000명이나 되는 여성이 납치당하고 강간당했다고 합니다.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 여성은 스스로 우물에 뛰어들어야 했고, 아버지의 칼에 목을 내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성과 아이들의 희생으로 지켜질 수 있는 공동체의 ‘명예’란 얼마나 허약한 것입니까? 여성의 몸으로 지켜지는 명예는 바로 남성의 명예이고, 여성의 희생은 그들의 허약한 남성성을 지키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는 게 바로 저자의 시각입니다. 비록 여자들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그런 이데올로기가 강요되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인도-파키스탄 양국은 납치의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자 납치여성을 서로에게 반환하기로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납치된 여성들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납치당한 여성들 가운데는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강제반환의 정책 때문에 그녀들은 아이를 두고 제 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말이지요. 실제로 송환을 거부한 여성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정치적 결정으로 자신들의 삶을 또 한번 송두리째 빼앗기고 맙니다.
'산지니 책 >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인이 말을 잘하는 이유 (4) | 2009.05.12 |
---|---|
근대 부산은 영화의 중심지였다. (2) | 2009.04.30 |
표절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 (0) | 2009.01.12 |
부산 갈매기와 미학美學 (2) | 2008.12.09 |
한겨레 전면 기사 <습지와 인간> (2) | 2008.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