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센트럴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흑인 거주 지역이다. <L.A. 위클리>의 기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크리스틴 펠리섹은 우연히 1980년대에 발생한 미해결 연쇄살인사건의 정보를 입수하고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가 얻은 피해자 리스트 속 사람들은 흑인 여성이었고 매춘과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펠리섹은 이들의 삶을 깊이 조사하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묻는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펠리섹의 추적이 흡인력 있는 문체와 함께 전달된다.
처음으로 발견된 희생자는 1985년 가슴에 총을 맞은 채 발견된 29살의 데브라 잭슨이다. 뒤이어 다섯 아이의 엄마인 헨리에타 라이트, 20대 초반의 바바라, 유일한 생존자 에니트라 워싱턴을 비롯한 피해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피해와 죽음은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 사우스 센트럴은 살인사건을 비롯한 난폭한 범죄가 매일같이 발생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죽음 또한 이곳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문제 중 하나일 뿐이었다. 1990년대부터 2003년까지 13년 넘는 휴식기를 지나 다시 희생자가 발견될 때까지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연쇄살인은 2007년 마지막 희생자가 발견될 때까지 20년간 계속된다. 이렇게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가 20년 동안이나 붙잡히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부유한 지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경우에는 범인이 이른 시일 내에 검거되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다.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이와 달리 사우스 센트럴 연쇄살인사건 해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사람들이 관심을 집중하게 된 것은 펠리섹이 쓴 기사 덕분이었다. 2008년 <L.A. 위클리>에 실린 기사에서 펠리섹은 연쇄살인범에 ‘잠들었던 살인마(Grim Sleeper)’라는 이름을 붙인다. 많은 사람의 기억에 사건이 오래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한 전략이었다. 전략은 적중했는데, 기사가 나오고 일주일 만에 5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포상금이 이 사건에 걸렸고 제보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펠리섹은 그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던 피해자의 가족을 방문한다. 기자를 만난 가족들의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여태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경찰과의 소통도 부재했다. 펠리섹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그들이 살아온 삶을 물었고, 인터뷰를 통해 피해자들이 어떤 엄마였고 어떤 딸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꿈꾸었는지가 드러났다. 그들이 피해자라는 납작한 한 집단에서 각자의 이름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살해당한 젊은 여성을 동정합니다. 하지만 사우스 센트럴의 살인 사건 발생 비율은 가장 높습니다. 그 흑인 지역에는 아이들의 갱단 입단을 막는 예방 조치가 하나도 없습니다. 흑인들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웨스트우드와 셔먼 오크스만 기회의 땅입니다. 사우스 센트럴은 범죄의 땅입니다. p.107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2010년 가족 DNA 검사를 통해 검거된다. 범인이 재판을 통해 유죄 선고를 받기까지 다시 지난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범인은 11건의 범행에 대한 선고를 받는다. 사건이 종결되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직업의식을 발휘해 가난한 지역의 잊혀 가던 사건을 널리 알린 펠리섹 외에도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사람이 목소리 높였다. 마거릿 프레스코드를 비롯한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살인사건이 처음 보도된 때부터 꾸준히 경찰의 적극적 수사와 의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더 나아가 이 지역의 흑인들이 계속해서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재판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범죄를 증언했다. 경찰은 그들을 외면했지만 그들은 사법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인생이 부유한 백인들과 다름없이 소중했다는 것을 법정에서 전한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은 만남을 통해 서로를 위로한다. 함께 분노하고 연대하며 사건의 종결을 향한 희망을 나눈다. 펠리섹은 범인의 서사보다 이들의 노력에 주목한다.
저보고 의무사항도 아닌데 왜 모든 예심에 다 참석하려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바라가 가족들과 친구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걸, 바바라의 인생이 중요했다는 것을 프랭클린 씨와 변호팀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법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재판 날짜가 곧 정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p.356
30년이 넘는 시간을 기록한 이 르포를 읽으며 나는 짧은 기사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피해자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상상했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과 꿈을 품고 살았을 여성들의 삶을 떠올렸다. 책을 따라 읽으며 언론과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피해자와 그 가족 모두에게 사건의 완전한 종결이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은 피해자의 존엄성이 회복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더불어 머릿속에 많은 질문이 생겨났다. 여전히 조지 플로이드 같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지금 우리 사회는 80년대 사우스 센트럴로부터 얼마나 나아졌는지, 인종과 계급의 문제가 동반된 성평등의 달성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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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슬리퍼』는 2019년 서울국제도서전에 '여름 첫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저자 크리스틴 펠리섹이 내한해 도서전에서 강연을 했는데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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